[박재현의 한 발 멀리서]김동연 부총리에게 혁신성장을 맡기기 전 했어야 할 일
신문A24면 TOP 기사입력 2018-08-14 20:58 최종수정 2018-08-15 10:27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를 ‘잃어버린 10년’으로 규정한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공무원들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집값 급등을 막기 위한 종합부동산세 도입에 관여했던 한 관료는 종부세를 두고 “사실 태어나지 말아야 할 세금”이라고 말했다. 각종 부동산대책을 마련했다는 공로로 훈장을 받은 공무원들도 정권이 바뀌자 이를 무력화하는 데 동원됐다. 경기부양을 위해 부동산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원칙도 시나브로 사라졌다. 정반대의 정책을 수립하는 그들에게 ‘고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정책의 골(목표)은 정권이 세우는 거야. 정부의 역할은 청와대가 세운 국정 방향을 정책을 통해 합법적이고 절차적으로 타당하게 구현시키는 거야.” 온화한 표정이었지만 목소리에는 냉소가 깔려 있었다. 기자는 그것이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직업 공무원들의 ‘숙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관료들은 승진과 영전 앞에서 유연해졌다. 4대강 사업이 추진되자 ‘절차적으로 타당한 편법’들을 만들어냈다. 기획재정부는 재해 예방사업으로 지정해 대규모 예산이 들어가는 사업이 무조건 거쳐야 하는 예비타당성 조사를 생략했다. 최소 1년이 걸리는 환경영향평가를 4개월 만에 마무리한 것도 테크노크라트의 전문성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일까. 박근혜 정부는 관료를 적극적으로 등용했다. 정부 출범 전 내정된 총리 등 18명의 국무위원 후보 중 12명이 직업 공무원 또는 국책연구기관 출신이었다. 1기 경제팀 수장은 대통령의 심기부터 살폈다. “투자하는 분은 업고 다녀야 한다”는 대통령의 발언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실제로 투자자를 업는 이벤트를 연출했다. 대통령을 업은 비선(秘線)과 실세들의 국정농단에 직업 공무원들은 묵묵히 조력했다.
진보 정권 10년, ‘보수 정권’ 10년을 거치는 사이 관료들의 생존본능은 강화됐다. 욕망은 강해졌지만 능력은 진화하지 못했다. 10년 수시 확대 교육정책이 순식간에 바뀌더니 대학입학 개편 논의는 1년을 끌어도 결론을 못 내리고 있다. 수년 동안 학생과 학부모의 원성에도 안되는 이유만 나열됐던 ‘코르셋 교복’ 문제는 대통령의 지시가 떨어지니 가시적 해결 움직임이 나타났다. 지난해 중국이 재활용 폐기물 수입을 중단키로 하면서 재활용 쓰레기에 대한 경고가 나왔지만 집집마다 플라스틱 쓰레기가 쌓인 이후에야 대책들이 쏟아졌다. 시민들이 미세먼지에 고통받고 있을 때, 고등어를 굽지 말고 외출할 때는 마스크를 착용하라는 것과 동급이다. 기상천외하거나 그러고 싶지 않아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방안들이 대책으로 포장됐다. 포장을 뜯으면 쓰레기였다.
관행에서 비롯됐던 직업 관료들의 ‘부패’들이 툭툭 튀어나오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 수뇌들은 대기업 수십 곳의 지분구조 신고 누락을 알고도 눈감아주고, 공정위 간부들은 퇴직한 뒤 유관기관 등에 취업할 때 법규를 어긴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 칼피아(대한항공+국토부 모피아)란 말까지 나올 정도로 항공 관료와 기업은 서로 이익을 주고받았다.
집권 2년차에 접어든 문재인 정부가 ‘혁신성장’을 경제의 동력으로 삼고 있다. 위기감이 커진 한국 경제를 혁신으로 돌파하겠다는 데 반대할 사람은 없다. 다만 ‘혁신성장’의 운전대를 전혀 혁신적이지 않은 관료들의 손에만 맡기는 데는 문제가 있다. 규제 완화나 연구개발 전폭 지원과 같은 늘 해오던 일을 문자만 바꿔 되풀이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김동연 부총리가 지난 13일 발표한 ‘혁신성장 전략투자 방안’은 지원할 산업을 나열한 정도의 대기업 지원 정책이다. 바이오는 삼성전자, 수소경제는 현대차의 수혜가 예상된다. 고장난 녹음기를 돌리듯 ‘게으른 경제학자’들이 시장 중심 경제 운용을 되뇌는 것과 같다.
지금 경제불안은 지난 10년 동안 수출·대기업 중심의 비즈니스 프렌들리(친기업 정책)와 재벌 기업의 투자에 매달리다 혁신의 기회를 잃어버려 생긴 결과들의 축적이다. 낙수효과는 없었고 양극화는 심화돼 ‘1 대 99’의 사회가 됐다.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중하위층 소득을 늘려 성장의 마중물로 삼는 ‘소득주도성장’이 등장한 것 아니었나. 소득주도성장이 ‘이념적 공세’로 너덜너덜해질 동안 수수방관하던 경제 관료들에게 책임을 먼저 물어야 했다. 모든 대선후보들이 최저임금 인상을 공약으로 내걸었을 때부터 충분한 대비책을 세우는 게 진정한 테크노크라트의 자세였다. 아직 재벌의 갑질과 일감 몰아주기를 통한 편법증여, 불투명한 지배구조 등의 문제는 제대로 해결된 것이 없다. 그러나 경제정책은 재벌과 관료에게 포획되며 다시 퇴보했다.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 없다. 그 안에는 천둥과 번개와 벼락이 몇 개씩 들어 있다. 땀과 고통 없이 과실만 따겠다는 것은 정권의 불가능한 기대일 뿐이다. 지금의 혁신성장이 성공하기 힘든 이유다.
그런데 개각은 언제 하는 걸까. 지금 가장 혁신적인 조치는 개각인데 말이다.
<박재현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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