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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건설업자라고 부르지 말아주십시오. 우리도 해외에서 달러를 벌어들이고, 기술을 개발하고, 각종 사회간접자본에 투자해 국가 경제에 이바지하는 기업인입니다.”

꽤 오래전 건설산업 발전을 주제로 열린 토론회에서 5대 그룹 계열의 한 건설사 최고경영자(CEO)는 정·관·언론계 인사들을 향해 이렇게 하소연했다. 국가 기간산업인 건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모두 비리나 뒷돈에 연루된 건설업자로 치부되고 있다는 푸념이었다. 당시만 해도 자재와 인건비를 빼돌려 비자금을 조성하는 창구가 건설사였다. 공사비는 부풀려지고 뇌물이 오가며 부실시공이 횡행했다. 신문과 TV 사회 뉴스에는 수많은 ‘건설업자 ○○씨’의 구속 소식이 흔하게 등장했다. 대형 비리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협회 차원의 ‘자정 대회’도 자주 열렸다. 그렇지만 그후로도 4대강 사업에서 대형 건설사들이 담합한 사실이 드러나고, 고분양가로 부동산 거품을 만들고 무리한 해외 수주를 감추기 위한 분식회계 의혹이 이어졌다.

건설업뿐 아니다. 기업인들을 만나면 시민들의 기업에 대한 평가가 매우 인색하다는 데 의아해하고 있다. 기업은 생산의 주역이며 투자와 고용을 책임지는 국가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다. 지금도 그들은 기업가 정신으로 소비자의 편의를 높이며 시장을 개척하고 그에 따른 성장의 과실을 키우고 있다. 이 때문에 성공한 기업인은 사회적 찬사를 받고, 난관을 극복한 기업의 성공 노하우에 사람들은 갈채를 보낸다. 경제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도전정신이 넘치는 기업들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산업 생태계는 정반대의 상황에 처해 있다. 개척할 시장은 줄어들고, 중국을 비롯한 후발주자들의 도전은 거세다. 위기는 눈앞에 왔는데 돌파구를 향해 돌진하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시장에 떡 하니 버티고 있는 재벌 때문이다. 재벌은 경영권 세습과 독과점, 원·하청 시스템이란 사슬을 통해 점점 한국 경제의 활력을 떨어뜨리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1심 선고공판에서는 권력과 재벌들의 뒷거래 일면도 볼 수 있었다. 재판부는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이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승마 지원비 72억9000여만원을 뇌물이라고 판결했다. 박 전 대통령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사이에서는 롯데 면세점 사업과 관련해 ‘부정한 청탁’이 오갔다고 봤다. 박 전 대통령이 SK그룹에 K스포츠재단의 해외전지훈련비 등으로 89억원을 요구한 것도 뇌물 요구 혐의로 인정했다.

개발 독재시대 유물인 정경유착의 생명력이 되살아난 것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MB) 집권 시기도 사정은 비슷하다. MB는 경제 성장이라는 명목으로 재벌들에 면죄부를 남발했다. 집권 첫해 광복절 특사로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 최태원 SK 회장, 김승연 한화 회장을 사면했고, 이듬해에는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을 ‘원 포인트 사면’해줬다. 그러나 효과는 약했다. MB 집권 5년간 경제성장률은 전 정부보다 내려갔다.

시민들에게 재벌은 애증이 교차하는 대상이다. 국민 경제 차원에서도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의 말처럼 “재벌은 개혁의 대상이지만 우리 경제의 소중한 자산”이기도 하다. 현재 재벌 총수들은 창업 세대가 아니지만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기업의 외형을 키우고 내실을 다진 게 사실이다. 또 취업준비생들이 선망하는 최고의 직장이며, 한국 경제를 떠받드는 수출의 주역이다. 반면 ‘땅콩 회항’에서 보듯 막강한 갑의 위치에 군림하며 골목상권까지 침입하는 산업 생태계의 포식자이기도 하다.

재벌 개혁이 늦춰지며 이제 재벌은 양극화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상위 5대 재벌과 그 이외 기업 간 격차가 점점 늘어나는 등 재벌 간 양극화도 한창 진행 중이다. 한국 경제의 재벌 편중화가 상위 재벌에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재벌 기업의 내부 양극화도 심해지고 있다. 경향신문이 금융회사와 공기업을 제외한 시가총액 상위 50개 기업의 지난해 사업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임원 1인당 연봉과 직원 1인당 연봉이 최대 40배 가까이 차이났다. 총수와 CEO들이 수십억원에서 많게는 200억원대 연봉을 가져갔기 때문이다. 직원 월급이 줄었는데 임원 월급만 늘어난 경우도 있었다. 재벌 총수들은 급여의 몇 배 되는 상여금과 배당으로 매년 수십억원을 챙기고 있다. 그 아래 협력업체들은 납품 단가를 올려달라고 아우성치고 있다. 최저임금을 핑계로 얼씨구나 하며 제품 가격을 올리는 바람에 소비자들이 그 부담을 떠안고 있다.

법률과 제도에 의한 재벌개혁도 필요하지만 재벌 스스로 양극화 해소를 위한 ‘이익 공유’에 나서야 한다. 경영 실적과 기업 가치를 올리는 것만으로 그동안의 부정적 이미지를 탈피할 수 없다. 아직 재벌에게는 ‘업자’의 이미지가 깊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전히 이어지는 편의 봐주기와 법적 면죄부는 오히려 그 이미지를 키워줄 뿐이다.

<박재현 산업부장>


Posted by 박재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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